[도시탐험, 서울 이야기](84) 작가 황석영도 살았다는 문래동 영단카지노 엘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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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 이야기](84) 작가 황석영도 살았다는 문래동 영단카지노 엘에이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8.04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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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 엘에이

[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황석영 작가의 소설을 읽다가 낯선 용어가 나와서 자료를 찾아본 적 있습니다. 황석영이 어릴 적에 살았다던 ‘영단카지노 엘에이’이 바로 그 용어였습니다.

영단카지노 엘에이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카지노 엘에이영단에서 지어 노동자 등에게 공급한 카지노 엘에이을 말합니다. 조선카지노 엘에이영단은 서울 인천 대구 부산 등 전국 19개 도시에 건설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특히 서울의 상도동과 문래동에서는 대규모 단지로 개발되었습니다.

황석영 작가가 살았다던 영단카지노 엘에이은 아마 문래동의 영단카지노 엘에이을 말하는 거로 보입니다. 영등포역 북쪽에는 공업지대가 있었고 그 바로 서쪽에 문래동 영단카지노 엘에이 단지가 있었습니다.

영단카지노 엘에이을 지은 ‘조선카지노 엘에이영단(朝鮮住宅營團)’은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거점 도시들의 카지노 엘에이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1941년에 세운 기관입니다. 광복 후인 1948년에 ‘대한카지노 엘에이영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62년에 ‘대한카지노 엘에이공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에 한국토지공사와 합병하여 한국토지카지노 엘에이공사, 즉 LH가 되었습니다.

계급에 따라 나뉜 영단카지노 엘에이

일제강점기 영단카지노 엘에이에는 주로 조선인 노동자들이 살았지만, 일본인 관리자들도 살았습니다. 영단카지노 엘에이은 다섯 개의 유형이 있었습니다. 갑(甲)형은 20평, 을(乙)형은 15평이었는데 일본인 관리자들이 살았습니다. 이 두 유형은 화장실이 딸린 비교적 고급형이었습니다.

반면 병(丙)형은 10평, 정(丁)형은 8평, 무(戊)형은 6평으로 좁은데다 공동 화장실을 써야 했습니다. 가족이 함께 살아야 했으니 주거환경이 열악하다 할 수 있습니다.

지하철 문래역 일대 지도를 보면 남쪽에 바둑판처럼 네모반듯한 구획에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필지들이 있습니다. 그곳이 영단카지노 엘에이이 있던 곳입니다. 준공업지역이라 카지노 엘에이과 소규모 공장이 함께 있습니다.

문래동 영단카지노 엘에이 단지는 1941년 10월부터 1942년 9월까지 공사가 진행되었고 총 631호를 지었습니다. 다만 논문에 따라 659호라거나 695호라는 다른 수치가 나오기도 합니다. 아무튼 600호는 넘었던 게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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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래동 영단카지노 엘에이 단지 일대. 준공업지역이라 카지노 엘에이과 공장이 함께 있다.

광복 후 영단카지노 엘에이은 광복 후 한국 회사가 된 대한카지노 엘에이영단의 관리 아래에 들어갔습니다. 문래동의 영단카지노 엘에이에는 영등포 일대의 노동자들과 서민들이 임대 형식으로 살았습니다. 황석영 작가는 광복 후부터 한국전쟁이 벌어지기 전의 시기에 이곳에서 살았던 거로 보입니다.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중산층과 지식인으로 살았던 작가의 부모는 광복 후 조국으로 돌아와 많은 걸 잃고 영단카지노 엘에이에 살게 되었는데 노동자 계급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었나 봅니다. 황석영의 자전적 소설인 <개밥바라기별에서 작가는 그의 집이 ‘영단카지노 엘에이의 노동자 구역 가운데서 동떨어진 섬’ 같았다고 회고합니다. 옷과 음식 등이 이웃 주민들의 그것과 달랐다면서요.

문래동의 영단카지노 엘에이은 1959년에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 등에게 불하되어 오늘에 이릅니다. 상도동 등 다른 지역에 있는 영단카지노 엘에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영단카지노 엘에이은 여러 유형으로 공급하는 표준카지노 엘에이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대한카지노 엘에이공사는 1960년대에 국민카지노 엘에이 단지들을 개발했고 1970년대에는 아파트단지들도 건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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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래역 쪽 문래창작촌 입구. 문래창작촌은 카지노 엘에이 철공소 골목들에 들어선 청년 예술인들의 작업실이 있는 곳이다.

공장들과 그 옆에 들어선 카페들

문래동의 영단카지노 엘에이 단지 근처에는 ‘문래창작촌’이 있습니다. 철공소 골목에 들어선 청년 예술인들의 작업실이 있는 공간입니다. 2000년대 들어 서울시의 공장 이전 정책과 재개발로 일부 공장들이 떠나자 그 공간에 청년 예술가들이 작업실을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창작촌이라기보다는 철공소 골목에 들어선 카페촌 같습니다. 물론 예술가들의 작업공간은 눈에 띄는 간판을 내걸지 않아서 그렇게 보입니다. 잘 보이진 않지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일대 철공소들에서는 청년 예술가들이 디자인한 작품을 공작기계를 이용해 만들어 주는 등 협업이 이뤄진다고 합니다.

작은 철공소들이 자리한 골목들을 걷다 보면 젊은 관광객들을 마주치게 됩니다. 이들은 철공소 골목 곳곳에 자리한 카페나 식당을 찾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2년 전쯤에도 이 골목들을 방문했었는데 카페나 식당이 그때보다 늘어난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카페 중에는 경관 자체가 공장 뷰인 곳도 꽤 있습니다. 그러니까 카페 창 너머로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며 차를 마시게 되는 거죠. 저라면 그런 시선이 불편할 듯합니다.

그러고 보니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저를 불편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낌새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어느 철공소 주인에게 물어보니 관광객들이 무턱대고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골목에는 주민과 공장 노동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자는 안내판이 있기도 했고요.

카지노 엘에이창작촌 일대에는 철공소 골목에 들어선 카페나 식당이 많다.

철공소 옆에 들어선 카페나 식당은 이곳만의 ‘감성’을 강조합니다. 을지로 일대가 ‘힙지로’가 되었듯이 카지노 엘에이의 철공소 골목에 들어선 업소의 주인들도 이 일대가 힙한 공간으로 뜨기를 바라는 거 같습니다.

이렇듯 문래창작촌 일대는 영단카지노 엘에이에서 살던 공장 노동자들이 떠나자 같은 자리에 철공소들이 들어섰고, 세월이 지나 철공소들이 나간 곳에는 청년 예술인들이 찾아온 동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빈 곳이 생기기만 하면 카페와 식당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래된 담벼락에는 벽화가 그려져 관광객들의 사진 배경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 모든 모습을 관련 부처와 지자체는 도시재생의 좋은 사례라며 홍보하고 있고요.

카지노 엘에이 일대를 돌아보며 벽화를 그리고 카페촌을 조성하는 게 도시재생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곳에 터 잡고 사는 사람들과 기반을 두고 일하는 사람들이 함께 활력을 갖고 살아갈 수 있을 때야 진정한 재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영등포시장 일대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카페 골목이 된 카지노 엘에이 철공소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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