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오래도록 농촌이었던 강남은 이주민들의 고장이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선 아파트단지나 주택단지에 살았던 이들도 이주민이라 볼 수 있지만 이들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이주민들과 그들이 살았던 업 카지노이 있습니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서초구 내곡동의 헌인업 카지노도 이주민들이 살던 업 카지노이었습니다. 1963년 나병원에서 퇴소한 음성 나환자들이 정착한 헌인업 카지노은 서울의 대표적 양계 단지였는데 축산업 규제가 심해지자, 가구단지로 변신했었습니다. 그러다 지금은 고급 주택단지로 재개발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입니다. 옛 모습은 찾을 수 없습니다.
월남민들이 정착한 신흥업 카지노
헌인업 카지노 서쪽에는 신흥업 카지노이 있습니다. 두 업 카지노 모두 헌릉로 바로 옆에 자리합니다. 헌릉로 건너편에는 헌인릉이 있고요. 지난 글에서 언급한 ‘흐능날’이 그 일대에 있었습니다.
전국에는 신흥업 카지노이라는 이름을 가진 업 카지노이 꽤 있습니다. 대개 광복 후나 한국전쟁 후 월남민들이나 외지인들이 정착한 업 카지노입니다.
도시 문헌학자 김시덕은 그의 저서들에서 ‘새말’, ‘새업 카지노’, ‘신촌(新村)’ 등 ‘새롭다’라는 의미가 들어간 지명은 외지인들이 어떤 지역에 들어가서 개척하고 형성한 업 카지노일 경우가 높다고 주장했습니다. 신흥업 카지노도 마찬가지인데 내곡동 신흥업 카지노에는 월남민들이 들어와 살았습니다.
‘서초구지’를 참고하면, 광복 무렵 월남한 김홍담 씨가 중심이 되어 신흥업 카지노을 개척했습니다. 이들 월남민이 한업 카지노을 이뤄 살았던 건 같은 고향 사람들끼리 뭉친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관계 기관에서 관리하거나 관찰하기 편해서 그렇게 이끌었단 분석도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신흥업 카지노 건너편에 정보기관 청사가 있습니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요.
신흥업 카지노은 한때 서울에서 가장 돼지를 많이 키우는 업 카지노이었습니다. 서초구지를 참고하면, 신흥업 카지노을 개척한 김홍담 씨가 돼지를 키우기 시작한 거로 보입니다. 그러다 1972년경부터 새업 카지노지도자 김현용 씨가 양돈업을 크게 일으켰다고 합니다. 1970년대 서울의 농촌을 소개하는 신문 기사들에서 신흥업 카지노을 서울의 대표적 양돈 업 카지노로 소개하곤 했습니다.
우연히, 제 중학교 동창이 김현용 씨의 조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부모님도 신흥업 카지노에서 돼지를 길렀기에 당시를 많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중후반에 신흥업 카지노에는 월남민들이 없었다고 친구는 기억했습니다. 광복 후 정착했으니 이미 30년 정도 흘러 이런저런 변화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신흥업 카지노의 흔적은 길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신흥말길’과 ‘신흥안길’. 헌릉로에서 신흥말길로 들어서면 도로 양쪽으로 농장 간판이 계속 보입니다. 가축을 키우는 농장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세곡천의 지류에 놓인 다리인 신흥교 앞에는 강남역·양재역 등 강남대로 일대와 연결되는 업 카지노버스 정류장과 구멍가게가 있습니다.
신흥말길을 계속 따라가면 군인아파트가 나오는데, 2024년 10월 현재 리모델링 중으로 보입니다. 아파트 인근의 군부대를 지나며 신흥말길은 좁아지면서 농장 간판이 보이는 길이 계속 이어집니다. 신흥교 앞에서 갈라지는 신흥안길도 좁은 길옆으로 농장이 계속 나옵니다. 지방의 여느 농촌 업 카지노로 보이는 풍경이 이어집니다. 이 일대에 월남민들이 살았었습니다.
철거민들이 정착한 샘업 카지노
샘업 카지노은 서울특별시 어린이병원 건너편에 있습니다. 헌릉로의 업 카지노 입구에 샘업 카지노 표지석이 놓여 있어 한때 거의 매일 광역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났던 저의 호기심을 자극한 업 카지노이었습니다. 어떤 내력이 담긴 업 카지노일까 하고요.
서초구지를 참고하면, 샘업 카지노은 1972년에 종로구 와룡동 철거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형성된 업 카지노입니다.
와룡동을 지도 앱에서 검색하면 창덕궁과 창경궁 영역을 표시합니다. 즉 궁궐 담장 바로 옆에 무허가 주택이 들어섰던 겁니다. 오늘날 창덕궁 서쪽 담장을 보면 담장 바로 옆에 건물들이 붙어 있습니다. 건축 관련 서류를 보면 1960년대에 준공된 건축물이 꽤 있습니다. 이들 건물은 양성화된 듯하지만 많은 집들이 헐리고 그들 중 일부가 내곡동으로 이주한 거로 보입니다.
궁궐 시설이 이런 지경이었을 정도로 과거 서울 도심 곳곳에는 무허가 판자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불량주택 정비라는 명목으로 곳곳의 판자촌을 철거했고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주로 서울 외곽으로 보냈는데 샘업 카지노이 자리한 내곡동도 그런 곳 중 하나였습니다.
업 카지노 이름에는 유래가 있거나 의미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서초구지 등 샘업 카지노을 다룬 자료에는 업 카지노 이름에 관한 어떠한 설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단서를 샘업 카지노 경로당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2002년부터 샘업 카지노에서 살았다는 임연옥 어르신은 자기도 궁금해 자료를 찾아봤지만 없었고, 다만 샘업 카지노에 물이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은 거 같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장마나 태풍 때 비가 많이 내리면 자기 집이 물에 떠 있는 거 같다나요.
그의 집에는 양수기가 세 대나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물이 많이 차오른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던 다른 어르신도 수긍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샘업 카지노 일대를 돌아보니, 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물길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윗샘과 아랫샘이라는 지명도 볼 수 있었고요.
그런데 샘업 카지노에 정착했다던 와룡동 철거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경로당 어르신들은 자기네가 이주해 왔을 때 철거민들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198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에 샘업 카지노로 이주해 왔다고 하네요.
마침 샘업 카지노에 거주한 적 있는 어르신들을 소개받아서 당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박재원(86) 이경자(81) 부부는 1980년에 박재원 어르신의 고교 동창 다섯 가족과 함께 샘업 카지노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다른 지역에서 거주하고 계십니다.
부부는 “딱지를 샀다.”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아마도 정부에서 철거민들에게 땅을 불하한 모양인데 이 권리를 샀다는 의미 같았습니다. 1980년경 부부의 동창을 포함해 15가구 정도가 동시에 이주해 왔다고 기억했습니다. 철거민들을 기억하냐고도 묻자, 당시 농사짓던 원주민이 4~5가구 정도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다만 이들이 철거민 출신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철거민 관련 자료를 참고하면, 철거 후 서울 외곽으로 이주당한 이들은 다시 서울 도심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일용직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에게 농사는 불확실한 미래였을지도 모릅니다.
호랑이가 출몰하던 외진 곳에 들어선 이주민 업 카지노들
헌인업 카지노, 신흥업 카지노, 샘업 카지노 등 이주민 업 카지노 자료를 살펴보다 보면 ‘어둔골’과 ‘범박골’이란 지명이 눈에 띕니다.
신흥업 카지노 일대를 과거에 어둔굴, 혹은 어둔골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숲이 우거져 어둡다고 해서 생긴 지명입니다. 어둔굴은 호랑이가 출몰할 정도로 외진 곳이었다고 합니다.
어둔굴 인근에는 범박굴이 있었는데 호랑이가 산다고 해서 생긴 지명입니다. 지금의 예비군훈련장 인근에 자주 나타났다고 합니다. 네이버 맵에서 범박골을 검색하면 신흥말길 끝자락과 연결되는 숲속이 뜹니다. 헌릉로가 뚫리지 않았다면 샘업 카지노과 연결되는 라인입니다.
그러고 보면, 헌인업 카지노, 신흥업 카지노, 샘업 카지노이 들어선 곳 모두 어둔굴이나 범박굴 인근입니다. 그러니까 이들 이주민이 살던 업 카지노들은 호랑이가 출몰할 정도로 외진 곳에 들어선 거였습니다. 기존 주민들이 살지 않는 외진 곳이라 이주민들을 보내어 살게 하지 않았을까요. 한때 강남은 중심에서 밀려난 이주민들이 모여 산 서울에서도 변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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